유니콘에 투자한 VC의 삽질 회고 — EP.2: AI가 만드는 비용을 0으로 만들었을 때 남는 것
만드는 비용이 0이 되면 뭐가 남는가. 코딩을 모르는 VC가 직접 5개를 만들고 나서 깨달은 것들.
📚 시리즈: 유니콘에 투자한 VC의 삽질 회고
- 5개 만들고 배운 것: 순서가 전부 틀렸다
- AI가 만드는 비용을 0으로 만들었을 때 남는 것 ← 현재 글
- 서비스별 실패 부검 - 숫자 공개
- 그래서 지금은 뭘 하고 있는가
지난 글에서 5개 서비스를 만들고 전부 트래픽을 만들지 못한 이야기를 했습니다. 오늘은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.
왜 10년 넘게 투자만 하던 사람이 갑자기 직접 만들기 시작했는가.
진짜 놀란 건 “만드는 것”이 아니었다
올 초에 테트라 홈페이지를 직접 리뉴얼했습니다. 2시간 걸렸습니다. 그 전에는 Notion과 oopy 조합으로 버티고 있었는데, AI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수십만 원짜리 외주 결과물보다 나은 것이 나왔습니다.
그 다음 주에 동화책 생성 서비스를 만들었습니다. 이틀. 그 다음엔 AI 비교 서비스. 사흘. 운세 서비스. 이틀.
솔직히 처음에는 “이게 되네?”라는 놀라움이 컸습니다. 코딩을 모르는 사람이 서비스를 배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으니까요.
그런데 진짜 놀란 건 그 다음이었습니다.
만드는 게 쉬워지니까, “뭘 만들지”가 훨씬 더 어려워졌습니다. 예전에는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아이디어 단계에서 멈췄습니다. 지금은 뭐든 만들 수 있으니까, 오히려 선택이 마비됩니다. 동화책도 만들 수 있고, 운세도 만들 수 있고, 챗봇도 만들 수 있는데 — 그래서 다 만들었고, 다 안 됐습니다.
투자자의 패턴 인식은 빌더에게도 통하는가
투자자로서 저는 “이건 안 될 것 같다”를 꽤 빨리 판단하는 편이었습니다. 100개 넘는 회사를 보면서 쌓인 감각이 있습니다. 시장이 작거나, 타이밍이 안 맞거나, 팀의 역량과 아이템이 맞지 않는 경우.
그런데 제 서비스에는 그 감각을 적용하지 못했습니다.
Dear My Kids를 만들 때, 투자자의 눈으로 봤다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. “타겟 미스매치입니다. Product Hunt 유저와 육아 부모는 겹치지 않아요. 재방문 구조도 없고요.”
근데 빌더의 눈으로는 그게 안 보였습니다. “만들 수 있으니까 만들자”가 앞섰습니다.
5개를 만들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. 투자자의 패턴 인식은 분명히 자산인데, 그게 자동으로 작동하지는 않습니다. 남의 회사를 볼 때와 내 것을 볼 때, 같은 사람인데 완전히 다른 판단을 합니다. 의사가 자기 수술을 못 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.
0원으로 만들 수 있는 시대에 진짜 비용
AI로 만드는 데 드는 돈은 거의 0입니다. 이건 사실입니다.
하지만 진짜 비용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.
5개 서비스를 만드는 동안 쓴 시간. 각각에 쏟은 기대와 에너지. 그리고 하나도 안 되었을 때의 심리적 소모. “무료인데 왜 안 쓰지?”라는 질문을 5번 반복하는 건 생각보다 지칩니다.
투자자 시절에는 이걸 몰랐습니다. 포트폴리오에 10개를 넣고 3개가 잘 되면 성공이었으니까요. 나머지 7개가 안 되는 건 “확률의 문제”로 처리됐습니다.
그런데 직접 만들면 그게 확률이 아닙니다. 전부 내 시간이고 내 에너지입니다. VC의 포트폴리오 이론이 1인 빌더에게는 통하지 않는 이유입니다. 자본을 분산할 수 있는 투자자와 달리, 빌더의 시간은 분산하면 없어집니다.
이 교훈이 가장 뼈아팠습니다.
그래서 남는 건 뭔가
만드는 비용이 0이 되면 뭐가 남는가.
저는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.
첫째, 뭘 만들지 고르는 감각. 100개를 만들 수 있는 시대에, 어떤 1개에 집중할지 결정하는 것. 이건 투자자 시절에 훈련한 근육이 맞습니다. 다만 남의 회사가 아니라 내 것에 적용하는 연습이 따로 필요합니다.
둘째, 안 될 때 빨리 멈추는 용기. 투자에서는 “손절”이라 부르는 것. 빌더에게는 이게 훨씬 어렵습니다. 내가 직접 만든 것에는 감정이 붙으니까요. 저도 Dear My Kids를 만들고 Product Hunt에 올리고 일주일 넘게 “좀 더 기다려보자”고 했습니다. 투자자였으면 하루 만에 판단했을 것을 말입니다.
결국, AI가 만드는 비용을 없애준 뒤에 남는 건 기술이 아니라 판단입니다. 그리고 그 판단을 내 것에도 냉정하게 적용하는 것. 이건 AI가 대신해줄 수 없고, 직접 부딪히면서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.
패턴을 안다는 착각
이건 VC 출신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. 컨설턴트, 애널리스트, 전략 기획자. 남의 것을 분석하고 조언하는 일을 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. “나는 패턴을 알고 있으니까 잘 할 수 있을 거야”라는 착각.
패턴 인식은 자산이 맞습니다. 다만 그걸 내 것에 쓰려면 별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. 저는 지금 그 훈련 중이고, 5개의 실패가 수업료였고, 오늘도 여전히 실패하고 있습니다.
다음 글에서는 그 5개를 하나씩 꺼내서, 각각 왜 안 됐는지 숫자와 함께 부검해보겠습니다. 투자자의 눈으로 내 서비스를 심사하는 셈입니다.
같은 고민을 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편하게 이야기 나눠주세요.